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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처받지 않을 권리
    book 2011. 12. 4. 15:51

    상처받지않을권리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지은이 강신주 (프로네시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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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에필로그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밝힙니다.  그 에필로그는 우리가 잘 아는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를 합니다. 나무꾼과 사슴이 작당모의 해서 선녀를 납치 감금 후 애 둘까지 낳았는데 나무꾼의 양심선언에 납치범을 사랑했던 선녀는 고민하다 애 둘과 함께 하늘나라로 돌아간다는 얘기죠. 이 책의 철학자는 이것을 "자유로운 상태에서 시작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공의 사랑이며 선녀는 인공을 버리고 자유를 택했다." 뭐 이 정도로 표현합니다. 사실 이것은 소비 자본의 시대에 살고 그것에 익숙해져서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우리들에 대한 은유였던 것이죠. 그리고 선녀는 날개옷으로 자유를 찾을 수 있었고, 우리는 소비 자본의 특성을 알고 그것을 피할수 있는 여러 방법과 생각꺼리를 날개옷 삼아 자유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완전 쉽게 읽히고 감동받은 책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보시면 더욱 잘 아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래는 책을 읽다가 밑줄 그은 부분입니다.

    2009년 그리고 노란종이비행기에서 울컥!
     
    화폐의 가치를 절대시하는 자본주의는 누구에게나 다양한 형태의 트라우마를 남깁니다. 자본주의는 우리 본성에 저절로 맞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게 배워야만 하는 경제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 p.29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라고 전제한다면, 그대는 인간을 인간으로서만, 사랑을 사랑으로서만, 신뢰를 신뢰로서만 교환할 수 있다. - p.51

    사람이 화폐를 수용하는 것, 즉 자신의 소유물을 파는 것은 그 화폐를 수용할 타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신뢰에는 궁극적인 근거가 없다) 즉, 화폐를 화폐이게 하는 것은 (그 화폐에 대한) 타자의 욕망이다. - p.58

    화폐를 화폐로서 기능케 하는 것은 임의의 화폐 수취인(타자)에 대해 그 화폐를 받게 될 후속의 타자(타자의 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 p.59

    윌렘 쿠닝의 고담 뉴스라는 그림은 그냥 애들 낙서 같다. 그런데 해설은 기가 막히다.

    우리가 소속되어 살고 있는 집단의 크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그래서 타인들과의 관계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 집단은 더욱더 쉽게 개인의 업적들, 생활양식 및 사고들을 감시하게 되며, 어떤 양적/질적 변종도 전체의 틀을 깨뜨리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 p.87

    짐멜에게 자유란 내 자신이 어떤 타인과도 구별되고, 이러한 구별됨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적극적 의미를 말합니다. - p.95

    산업자본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자신의 삶에 필요한 상품만을 구매하면, 잉여가치를 얻겠다는 산업자본의 끝없는 욕망은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산업자본은 필요이상으로 상품들을 사들일 만큼 소비자들을 끊임없이 유혹해야만 합니다. - p.119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는 결국 해결된다고 보는 진보에 대한 맹신은 현재 우리가 당면한 억압적 상태, 즉 '비상 상태'를 도리어 은폐시켜버립니다. - p.129

    이제 사람들은 필요해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유함과 허영을 과시하기 위해서 고가의 상품들을 구입합니다. 아마도 부르디외라면 이러한 현상을 '구별짓기(distinction)'의 경향이라고 불렀겠지요. 물론 이것의 밑바탕에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는 무의식적 자각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애초에 구별된다면, 겉으로 구별 지으려는 억지 행동은 결코 하지 않겠지요. - p.135

    먼저 패션은 상류사회에서 기원하며 그것을 중간계급이 모방한다. 패션은 위에서 아래로 퍼져 나가는 것이지 결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p.136
    애플의 고가 정책, 애플 store가 생각났다.

    패션의 수명은 패션의 보급 속도에 반비례하며, 우리 시대에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점점 더 완벽해지면서 패션의 전파 수단도 증가하는 만큼 패션은 점점 단명하게 된다. - p.136

    약체인 데다 어리석은 패션을 흉내만 내는 계층도 자신의 존엄에 눈을 뜨고 자부심을 느끼게 되면 ... 패션은 운명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의상으로 신분 차이를 강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거나 혹은 신분 차이가 있을 경우 그것을 존중하기에 충분한 분별이 있던 다른 민족에게서 한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는 다시 본래의 장소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 p.137

    우리는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라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기보다 오히려 탐욕스럽고 잔인할 뿐만 아니라 질투심으로 가득 찬 허영의 존재에 더 가깝습니다. - p.137
    인간이 합리적 소비를 한다는 전제의 자유 시장 경제 이론이 잘못되었다는 것

    예링에 다르면 인간은 합리적이기는 커녕 오히려 "변화욕, 미적 감각, 겉치레를 좋아하는 것, 모방본능"을 특징으로 하는 존재입니다. - p.138
    원숭이다.

    첫째, 패션은 예링이 지적했듯 상류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해 계급적인 구별을 두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패션은 계속 매출을 올려야만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패션은 인간에게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점 또한 중요합니다. - p.141

    에로티시즘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사실 금지와 금기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p.155
    애플 기기에서의 탈옥


    도박꾼이 거는 푼돈은 맹신도의 기도와 같습니다. 맹신도는 자신의 기도를 과연 신이 들어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더욱 절박합니다. 만약 기도할 때마다 신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준다면, 그의 기도에는 어느 순간부터 절박함이 사라지겠지요. 도박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판돈을 거는 도박꾼도 운명의 여신이 자신에게 미소를 지을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도밖군은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록 더 애타게 그 결과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도박이나 기도라는 행위에서 결과 그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도박과 기도라는 행위가 미래에 대한 기대의 몸짓이라는 점 입니다. 간절하게 기대했기에 미래는 우리에게 의미있는 무엇으로 다가오겠지요. 돈을 따거나 잃을 수도 있고 기도가 뜻대로 이루어질 수도 혹은 좌절될 수도 있지만, 사실 이것은 도박꾼과 맹신도들에겐 그 다음 문제일 뿐입니다. - p.163~164

    벤야민이 숙고한 것은 자본주의가 가진 합리적 측면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듯 보이는 자본주의의 이면에 그는 인간의 무지 혹은 종교성과 같은 비합리적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벤야민이 보기에 자본주의의 생명력은 오히려 종교성 자체에 있었습니다. 벤야민은 태고시대부터 인간을 지배했던 종교 논리를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맥락에서 만약 돈이라는 신에 대한 철저한 복종, 그리고 신의 은총을 기다리는 소망과 기대 심리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는 결코 기능할 수 없다고 보았지요. - p.179
    바라는대로 이루어진다면 자본주의는 무너진다: 욕구의 해소→욕망의 소멸

    자본주의에서의 사랑에는 항상 비극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포함한 모든 것 위에 돈이라는 신이 군림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현대 여성들은 그 누구라도 제 2의 춘희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겠지요. 지금은 배우자의 조건 중 경제 능력이 가장 중요한 시대입니다. 나에게 돈을 많이 가져다주는 사람을 남편으로 사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표현은 그럴듯 하지만 사실 이것이야말로 매춘의 논리에 가장 가깝습니다. 상대에게 자신을 허락하는 첫번째 조건이 돈 문제라면 누구도 이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고티에처럼 사랑이 찾아들면, 더는 매춘행위를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과 매춘 사이의 비극, 혹은 춘희의 비극이 여전히 반복되는 조건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 사랑이 자본주의의 포섭을 막는 일종의 혁명적 힘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능력 때문입니다. - p.192~193

    나는 타인을 자유롭게 소유하려고 하고 동시에 타인 또한 자유롭게 나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품을 때에만 사랑은 완전한 형태를 이루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특정한 사회에 태어나고 그곳에 적응하게 마련입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특정한 사회의 행동 원칙이 각인됩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내면화된 사회적 구조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특정 상황에 적응하면, 인간은 그 사오항에 맞는 습관적 구조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특정 사회에 살면서 얻게 되는 이러한 무의식적 습관 구조는 그 사회에 그대로 머무는 동안에는 의식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내면에 각인된 습관적 구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낯선 환경에 던져졌을 때에만 우리는 내면에 깃든 기존 관념들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 p.212
    물 속의 물고기

    화폐 경젝가 확립되어야 비로소 미래에 대한 염려가 가능하고, 미래를 염두에 둔 시간관념도 가능해집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의식 속에서 미래의 소비에 대해 합리적으로 계획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의 현재를 통제하며 조절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시간의식이 지닌 전형적 특징입니다. - p.214

    '습관(Habit)'의 어원인 라틴어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부르디외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로서, 그는 아비투스를 '구조화된 구조이자 동시에 구조화 하는 구조'라고 설명합니다. 행위자의 내면에 만들어진 습관적 구조로서의 아비투스가 '구조화된 구조'인 이유는 그의 말대로 그것이 '특정한 물질적 존재 조건'에서 형성되고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의 과거 스보간적 구조인 아비투스가 런던, 자본주의, 청교도라는 물질적 조건에서 만들어졌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아비투스가 '구조화된 구조'일 분만 아니라 '구조화 하는 구조'이기도 한 이유는 이것이 세계에 대한 행위자의 실천을 낳는 능동적 힘으로서도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 p.217~219
    삶에 대한 태도가 삶의 습관을 만들고 그것은 인생을 결정한다.

    전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연로한 노인들이 존경과 공경을 받았던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라는 반복적으로 순환되느 ㄴ시간을 가장 오래 경험했기 대문에, 전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인들은 지혜의 보고로 인정되었지요. ...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서면서 노인들은 이미 케케묵은 사람들, 지금은 통용되지 않는 너무 낡은 지식만을 가진 사람으로 폄하됩니다. 노인들 지위가 이렇게 격하된 데는 자본주의 사회가 현재아노느 다른 미래를 기획하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전 자본주의적 아비투스와는 달리 자본주의적 아비투스는 부르디외의 말처럼 "미래를 가능성의 장으로 표상할"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가능성'이라는 개념이겠지요. 가능성이란 어떤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앞서 살펴본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는 '잠재성'이란 개념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잠재성이란 개념은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것이 씨앗처럼 존재하다가 마침내 완전히 펼쳐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전자본주의적 인간이 자본주의적 인간형으로 대체되면서, 미래의 의미 역시 이제 '잠재성'에서 '가능성'의 의미로 바귀게 됩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돈, 즉 화폐경제의 출현이었습니다. - p.222~223

    돈의 사용은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하게 만드는 상호배타적 성격을 갖습니다. 이 때문에 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가진 돈을 합리적으로 사용하고자 계획해야 합니다. - p.225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자본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인식론적 단절이 있는 셈입니다.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인접해 있지만 두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세계와 자신을 이해했던 방식은 현격히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 p.226

    노동은 보통 자연에 대한 합목적적 개조라고 설명됩니다. ..... 결국 노동이란 자연에 대한 일종의 강탈이자 폭력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든 결국 나무는 집을 짓기 위한 목적 때문에 마음대로 잘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자본주의 사회에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노동이 자연을 개조시켜도, 그들은 자신의 노동을 마치 자연에 바치는 제물처럼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전자본주의 사회가 기본적으로 농업경제로 유지되었던 사실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
    흥미로운 점은 전자본주의 사회, 즉 농경사회의 인간이 자연에 대한 자신의 폭력과 그로 말미암아 생길 수 있는 자연의 보복을 '증여'의 논리로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농부의 노동을 자연에 바친 공물로 간주한다면, 농부의 수확인 자연은 농부가 바친 공물의 대가로 내려준 대응적 선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전자본주의적 사회에서는 자연이 일종의 신적 존재와도 같은 그 무엇으로 표상됩니다. 공물을 받고 답례도 할 수 있는 성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선물과 대응 선물, 그리고 이어지는 공물과 또 다른 대응 선물. 이러한 패턴은 결국 인간의 노동 행위를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거대한 운동의 일환으로 사유하게 합니다.
    ...
    농부들은 만약 자신들이 끊임없이 공물을 바치지 않는다면, 신이 어김없이 분노를 드러내리라고 믿습니다. 이 때문에 전자본주의 촌락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쉬지 않고 일 합니다. 비록 농한기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끊임없이 일을 찾아내서 예비하고 준비하며 자신들의 노동행위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신들의 노동이 신 혹은 자연에게 공물로 바치는 성스러운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부르디외느 ㄴ알제리의 농촌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했습니다.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이란 구별이나 '수익성이 있는 노동'과 '수익성이 없는 노동'이란 구별도 부차적 차원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 사회에서 보다 근본적인 대립은 '사회적 의무를 결여한 무위도식하는 (혹은 나태한) 사람'과 '노력의 산물이 무엇이든 간에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노동하는 사람' 사이에 세워진다. 휴식하는 순간에도 진정한 농민은 조그만 작업이라도 수행하려고 하며, 그것에 매우 자긍심을 느낀다. 이 조그만 작업들에는 밭에 울타리치기, 나무 깎기, 짐승들로부터 어린 가축을 보호하기, 밭의 감시 같은 것이 포함되는데, 이것들은 마치 예술을 위한 예술처럼 농민 생활의 기술에 속하는 것들이다. 농민들이 수익성과 수확고를 염두에 두지 않고 혹은 생산성에의 강박 관념도 없이 주어진 일을 성스럽게 수행하는 이유는 그들의 행위와 노력은 그 자체로서 수단이고 목적이기 때문이다."
    ...
    만약 어떤 해에 수확량이 증가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부지런한 노동에 대한 자연의 선물, 혹은 자연이 내린 보답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자신의 재주와 능력으로 수익을 올린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았지요.
    ...
    이 때문에 농부는 노동을 자신의 사회적이자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고 수단인 행위로 생각합니다. 자연이 어떤 대가를 내리더라도 자신은 해야할 일을 마땅히 다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 p.228~233

    지금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한가지 대안으로, 동양의 전통 사유가 각광을 받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산업자본이 일으킨 환경 파괴의 대안으로 생태 철학이 강조되는 것과 거의 동일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동양철학이나 생태철학이 기본적으로 전자본주의적 삶과 사유 형식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동양철학에 대한 동경 혹은 동양적 사유의 회복은 일종의 노스텔지어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 p.237

    "미래를 가능성으로서 가지지 않는 사람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미래를 계획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 p.239

    농민들이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자연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만큼 경제적 여력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그럴 경우 그들은 자신의 노동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직시하겠지요. 마찬가지로 도시 실업자들의 경우에도 자본주의 체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만큼 최소한의 생계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이때 비로소 그들은 자신의 실업 문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를 직시할 여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 p. 243

    "미래의 현실주의적인 전망은 실제로 현재에 직면할 수단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접근 가능한 것이다"라는 부르디외의 지적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를 영속적으로 유지하려는 기득권자들이 '현재에 직면할 수단'을 프롤레타리아로부터 박탈하려고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
    생계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한, 자신의 현실에 직대면할 여유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언젠가는 이들의 불만이 감정적으로 폭발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부르디외의 지적처럼 "현재에 의해 너무 짓눌려서 유토피아적 미래 -- 그것은 현재의 성급하고 주술적인 부정이다 -- 와는 다른 것을 겨냥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자기 포기 혹은 마술적인 조급함" 정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병을 정확히 진단하고 직시해야만 합니다.
    -  p.245

    베르그송의 지적처럼 이렇게 웃음은 상투적으로 반복되는 행동, 혹은 일상에 대한 조롱의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웃음에는 혁명적 힘이 있는 법 입니다. 그것은 유연한 생명의 운동을 긍정하는 반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행위를 거부하는 무의식적 행위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 p.261
    프랑스 시인 베를렌(Paul Verlaine, 1844~1896) <가을의 노래(Chansong d'automnel> "가을 날 비오롱의 긴 오열은 단조로움에 괴로워하는 내 마음 아프게 하는구나" - 윤석철 교수의 "삶의 정도"에서 재인용.
    "단조로움에 실증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속성"이라고 한다.

    주중에는 정상적으로 노동을 수행하다가 주일만 되면 가장 경건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설교를 하는 로빈슨의 모습이 문제였습니다. 기계적으로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로빈슨의 진지한 모습 때문에 그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지요. 다시 말해 방드르디는 자신의 주인 로빈슨이 가진 기계적 습관의 구조, 즉 아비투스에 직면하여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것 입니다.
    ...
    로빈슨은 "나의 비참한 고독은 나에게도 부족하지 않게 남아있는 돈의 혜택을 박탈해간다"라고 탄식한 적이 있습니다. 로빈슨의 탄식은 곧 자신의 수중에 가진 돈을 보니가 더욱 고독해진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지요. 난파선에서 남은 돈을 가지고 왔지만 그것은 오히려 로빈슨의 고독만 깊게 했을 분입니다. 돈은 교환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데, 로빈슨에게는 돈과 상품을 교환할 사람이 전혀 없었지요.
    - p.262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도덕 및 종교와는 전적으로 무관한 개인적 이윤 추구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전한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오히려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은 자본가들이 프로테스탄티즘 원리에 입각해서 자신의 직업을 종교적 의무와 책임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 입니다. - p.265

    칸트의 유명한 정언명령, 즉 무조건적 명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는 너 자신의 인격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
    "타인을 단순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최종 목적이고 인간은 언제든 수단으로 전락하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인간을 최고의 목적으로 간주한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붕괴되겠지요. 그렇다면 앞서 인간을 단순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고 강조한 칸트는 자본주의 사회를 폐기하자고 주장한 것일까요?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단순한 수단'이라는 칸트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사실 인간을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도 포함된 수단', 다시 말해 인간을 좀더 '복잡한 수단'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비록 내가 돈으로 짐꾼을 고용했다고 할지라도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인간이므로 그를 노예처럼 부리지는 말라는 것 입니다. "힘드시지요. 음료수라도 한 잔 마시면서 쉬엄쉬엄 일하세요." "고생 많으십니다. 요새 날시가 더워서 일하기 힘드시죠." 이런 식의 인사말을 주고 받으며 인간적으로 짐꾼과 관계하라는 것 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칸트 식의 발상은 자본주의의 역설을 완화하는 역할을 할 뿐 입니다.
    - p.267

    칸트에 따르면 진선미의 세계는 우리의 관심이이론적 관심, 실천적 관심, 아니면 무관심에 따라서 다르게 드러나는 것 입니다. 칸트가 유명한 세 가지 비판서를 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첫번째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론적 관심으로 드러나는 진리의 세계를 다루었고,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실천적 관심으로 드러나는 윤리의 세계를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판단력비판"에서는 무관심을 통해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다루었습니다. - p.269~270
    흔히 유명한 "순수이성비판"만으로으로는 칸트를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다.

    부르디외는 "구별짓기: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이라는 대작을 내놓습니다. 이 책을 통해 부르디외는 노골적으로 칸트의 미학이 추구하던 순수성을 비판합니다. 우리말 번역본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원래 프랑스 원서에서는 이 책의 부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번역서의 부제는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이지만, 원래 부제는 '판단에 대한 사회적 비판'입니다. 부르디외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사회철학적으로 비판하고자 한 것 입니다. - p.271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는 경제적 자본 이외에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세 종류의 자본을 더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첫째가 문화자본(capital culturel)입니다. 이것은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미적 감각 그리고 사람들이 소장한 작품들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학력자본(capital scolaire)입니다. 이것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장을 따거나 국가 고시와 같은 시험제도를 통과해 얻는 자격 혹은 지위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관계자본(capital de relation social)입니다. 이것은 문화 자본과 학력 자본을 얻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인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p.285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허영(vanity)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 p.286

    여러분의 현재 노동은 미래의 월급이라는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 때문에 노동의 세계는 수단과 목적을 분리시키고, 동시에 과거/현재/미래를 나눌 수 있는 분절적 힘을 갖고 있습니다.
    ...
    흥미로운 점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이 같은 시간 의식은 기독교의 시간 의식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것 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현재를 고통의 순간, 미래를 위해 희생되어야 할 괴로운 순간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 따르면 미래의 어느 순간 우리는 반드시 죽게 되고, 바로 그 순간 신의 심판이 곧 시작되겠지요. 신은 살아있을 때 행실을 토대로 우리 자신을 심판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독교의 심판 논리를 믿는다면, 우리는 현재의 삶을 미래의 그날을 위한 하나의 수단 쯤으로 간주하겠지요. 현재의 삶은 단지 천국으로 가느냐 아니면 지옥으로 가느냐를 결정하는 시금석이 될 뿐 입니다. - p.300

    68혁명은 드골 정부와 기득권 세력이 지향하던 경쟁 교육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당연히 주축 세력은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포함한 학생들, 특히 이 가운데서도 고등학교 학생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경쟁 교육의 이면에는 자본주의적 고용 문제가 동시에 깔려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만이 산업 자본주의 아래에서 고소득의 직종을 얻을 수 있는 동반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의 시위에 노동자들까지 총파업으로 가세하면서 68혁명은 그 절정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교육이나 노동 현장에서 소외된 삶을 살던 거의 모든 사람이 함께 혁명의 대열에 참여한 셈입니다. 당연히 수많은 학생과 노동자들은 즐거운 교육, 즐거운 노동을 요구했지요. 그렇지만 불행히도 혁명은 성공하지 못한 채 막을 내리고 맙니다. 한 때 드골 대통령을 망명의 기로에까지 내몰고 갔던 강렬한 혁명의 분위기는 노동총연맨이라는 좌파연합과 프랑스 공산당의 농간으로 결국 좌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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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혁명의 문제와 관ㄹ녀하여 한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프랑스 내의 공식 좌파 세력들이 혁명과 혁명의 정신을 배반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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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프랑스 공산당을 대표로 하는 좌파 세력들은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모토로 삼은 정치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자유와 해방을 외친 혁명을 배신했을까요? 좌파 세력들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표하고 대변하며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자임했습니다.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을때, 프랑스 공산당은 그들의 정치적 기득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을 느꼈던 것 입니다. 사실 프랑스 공산당은 억압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음을 철저히 반생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유지하는 보수의 길을 선택했던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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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권리는 누군가에 의해 대표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의 권리는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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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혁명 이후 프랑스 지식인들은 이제 두 가지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첫번째 문제는 인간을 경쟁으로 내몰며 삶과 노동을 소외시키는 산업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두번째 문제는 누구에게도 권리를 양도하지 않는 직접 민주정치는 어떻게 가능한가였습니다.
    - p.323~326
    윤석철 교수의 "삶의 정도" 1부 수단매체의 세계에서 정반대의 논지를 편다. "내일을 위한 오늘의 희생 정책"이라고 드골의 정책을 표현함.
    오늘날 한나라당의 한미 FTA 날치기에서 민주당이 보인 행태와 프랑스 공산당이 보인 행태는 묘하게 닮아있다.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행위, 다시 말해 새로운 유행을 만드는 산업자본의 행위 자체가 시간 차이를 만들어내기 땜누입니다. 유행이란 어떤 과정을 거쳐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유행이란 소비자들이 집단적으로 특정 스타일을 선호하고 선택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원인과 결과가 전도된 것이지요. 유행은 소비자들이 아니라 산업자본에 의해 우선적으로 창출되는 것 입니다. - p.328

    소비자가 사용하는 기존 상품을 '낡은' 것으로 만들려는 목적입니다. 현재 산업자본은 광고를 통해서 우리가 가진 '낡은'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구매하도록 유혹합니다. 만약 세탁기의 사용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광고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지요. -  p.331

    타인으로부터 주목과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과 허영 같은 감정이 있기에 산업자본의 기호가치가 작동할 수 있었다는 점 입니다. 소비사회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통찰이 중요한 이유도 그가 인간에게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욕망 혹은 허영이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점은 벤야민이나 부르디외의 통찰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구별짓기 욕망에는 다음과 같은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부당하게도 자신의 현재 삶은 행복하지 못하다는 일종의 피해의식 말 입니다. - p.333

    이제 베버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주장을 살펴 봅시다.
    "프로테스탄트적 금욕 자체는 아무런 새로운 점이 없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적 정신은 이런 금욕의 과정을 매우 강력하게 심화시켰을뿐만 아니라, 그 규범은 통용되기 위해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을 만들어냈다. 즉 노동을 직업(소명)으로, 다시 말해 구원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좋은 그리고 궁극적으로 유일한 수단으로 파악함으로써 심리적 동인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 금욕은 다른 면에서 기업가의 화폐 취득도 '소명'이라고 해석하여, 위와 같이 특별히 노동 의욕을 가진 자들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 했다. 분명한 것은 직업으로서 노동이란 의무를 수행하면서 부르주와 계급이 신의 나라를 배타적으로 소망할 때나, 혹은 교회 규율이 당연히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강제할 때 요구된 것이 엄격한 금욕이었다는 점이다. 이 금욕 정신이 자본주의적 의미에서의 노동 '생산성'을 강력히 촉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영리활동을 '소명'으로 보는 것이 근대 기업가의 특징이듯이, 노동을 '소명'으로 보는 것도 근대 노동자들의 특징이 된 것이다. - p.337

    "생산과 소비는 생산력과 그 통제의 확대 재생산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똑같은 거대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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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과 개성을 자유롭게 분출하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다는 일종의 환각을 갖습니다. 그렇지만 보드리야르는 냉정하게 지적합니다. 우리가 가진 "욕구와 그 (욕구의) 충족은 오늘날에는 다른 생산력(노동력 등)과 마찬가지로 강요되고 합리화된 생산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고유한 욕망조차도 산업자본주의에서는 생산력의 일환으로 간주되고 포획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 p.349

    소비사회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유대감을 소비사들 사이의 경쟁적 허영심으로 변질시킵니다. 이에 휩쓸린 소비자들은 자기과시의 치열한 소비 경쟁에 빠져듭니다. 그 결과 우리는 연대의 전망을 잃고 고립된 개인들로 산산이 분해되고 맙니다.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최근 산업자본의 경향입니다. 산업자본의 소비 논리는 이제 한 인간의 내면마저도 산산이 쪼개어 분열증적 소비촉진의 경향으로 심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로서의 자아, 어머니로서의 자아, 전문직 여성으로서의 자아, 동창 모임 성원으로서의 자아 등등으로 쪼개질 수록 한 개인이 소비하는 상품의 목록은 그만큼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소비사회는 궁극적으로 소비자이며 동시에 노동자의 연대 가능성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통일성마저도 가능한 분해하려는 것 입니다. 매우 무서운 일이지요. 노동자이며 소비자라는 자신의 현실을 망강하게 하고, 동시에 소비자의 내면조차도 소비행위의 촉진을 위해 산산이 분열시키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런 비극적 상황으로부터 우리는 역설적 교훈을 얻습니다. 분열된 자아상을 연결하여 통일적 인격체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아가 분열된 개인들을 연결하여 통일적 연대를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결국 우리는 산업자본주의가 던져놓은 거대한 욕망의 집어등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교훈을 말입니다. - p.353

    호주머니에 돈이 두둑하면 자유의 감정, 두려움 없는 당당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원하는 상품을 마음대로 구매할 자유, 즉 이러한 소비의 자유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을 적절히 생산할 수 있는 '생산의 자유'가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생산의 자유'란 결국 자본가 자신이 독점하는 것이지요. - p.363

    선물이 존재하려면, 어떤 상호 관계 반환, 교환, 대응  선물, 부채 의식도 존재해서는 안된다. 만약 타인이 내가 그에게 주었던 것을 내게 다시 돌려주거나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거나, 또 반드시 돌려주어야만 한다면, 나와 타인 사이에는 어떤 선물도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이런 반환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든 아니면 상당히 긴 유예 조건들을 계산하여 이루어지든 간에 관계없이 말이다. 특히 타인이 내게 동일한 것을 직접 되돌려주는 경우에 이 점은 훨씬 더 분명해진다. - p. 366

    19세기에 살았던 마르크스가 오직 생산력의 문제에만 주목했을뿐, 20세기나 21세기에 전개되는 새로운 양상의 소비사회를 예감하지 못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 입니다. - p.380

    생산력의 발전이란 미명하에 억압받는 자들은 여전히 억압을 받는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 p.381

    소비 영역은 소비자가 노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산업자본의 음모, 나아가 소비자의 허영을 부추겨 소비를 촉진하려는 산업자본의 전략이 관철되는 매우 중요한 공간입니다. - p.381

    바타유의 일반경제론에 따르면, '필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치'이고, '생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비'이며, '축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가없이 이루어지는 선물'입니다.
    ...
    하지만 좀바르트나 보드리야르의 용례와 달리 바타유가 사용한 '사치'나 '소비' 개념은 자본주의 경제가 지향하는 '생산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나 인간문명을 넘어서 태양 에너지의 도움으로 살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숙명과 관련된 문제를 논하기 때문입니다.
    "지표면의 에너지 작용과 그것이 결정짓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유기체들은 원칙적으로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ㅁ낳은 에너지를 받아들인다. 그 때 초과 에너지는 체계의 성장에 사용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 체계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게 된다면, 또한 그 초과분이 그 체계의 성장에 완전히 흡수될 수 없다면, 초과에너지는 마지못해서든 또는 영광스럽게 재앙을 부르면서든 간에, 반드시 대가없이 상실되고 소모되어야만 한다.
    - p.387~388

    제한경제에 대한 우리의 무모한 확신은 생산성과 인간 이성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에 기초합니다. 그렇지만 바타유는 생산성과 인간 이성의 빛나는 증거라고 이야기하는 산업자본주의 발달이 결국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소모전을 일으켰다고 경고합니다. 그에게 이는 과잉 에너지의 무조건적 소모로 이해될 분명한 사례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제한경제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전쟁의 원인을 히틀러와 같은 부도덕하고 비합리적인 한 개인의 등장 혹은 우연적 사건으로 돌리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들은 바타유가 이야기한 일반경제의 진리를 은폐하기에 급급합니다. 바타유는 기존 제한경제가 그리고 체계가 지닌 근본적 충동, 다시 말해 과잉 에너지를 '보상없는 낭비 또는 증여를 통해 돌리려는 충동'을 저주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 p.391
    농산물의 풍년 또는 과잉 수입이 있을 때, 어떤 농부는 밭을 갈아엎기도 한다. 채산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게 보이지 않는 손인가?
    코드를 아름답게 짜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코드와 구별 지으려는 시도. 
    코드는 아름답게 짜는게 아닌, 인간적이고 정직하게 짜야 한다. 
    아름다움은 구별짓기(classify)를 통한 계급화 시도에서 비롯됐기 때문.
    코딩도 민주적으로!
    효율이 아닌 효과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 생산성을 따질 필요가 없는 이유.

    모스의 연구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가 부의 축적을 제일의 목적으로 간주하는 사회인데 반해, 증여의 사회에서는 부의 축적이 아니라 오히려 부의 지출이나 베풀기를 가장 중요한 덕목 혹은 가치로 믿는 사회였습니다. 모스는 증여의 사회에서 무엇인가를 증여하는 사람이 지출이나 베풀기를 통해 얻는 것, 즉 증여의 대가로 얻는 것은 위신이나 명예라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증여는 결국 이 사회에서 위신이나 명예와 대등하게 교환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바타유는 모스의 논의에 비판적으로 개입합니다. 그는 모스가 말한 원주민 사회의 증여 논리를 호혜적 교환의 체계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바타유가 강조한 것은 증여의 핵심이 교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증여 자체가 함축하는 과잉 및 그로부터 이어지는 손실이란 논리였습니다. - p.396

    모든 것은 단적으로 말해 하나의 고유한 선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입니다. -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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